중학시절 우연히 손에 잡은 형의 기타는 학창시절 내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상하이트위스트], [파이프라인], [블독]등 벤처스 넘버들을 손끝이 짓무르도록 연습하고 집안 몰래 음악학원에 다니며 본격적인 기타 수학을 하던 그는 1968년 2월, 경동고 졸업식을 앞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왔다.
음악인을 딴따라라고 부르고 대중문화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그때,음악이 하고 싶어 무작정 집을 뛰쳐 나온 청년의 음악을 향한 첫걸음은 그렇게 뜨겁고 절박했다.
1976년 발매된 앨범에 수록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미8군 무대에서 실력을 쌓아가던 무명의 조용필을 유명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달콤한 성공의 시간도 잠시, 유신 아래 반체제 포크, 록가수들에 대한 탄압의 도구였던 대마초 사범 검거령은 유명해진 그 역시 가만두지 않았다.
원치 않은 은퇴선언을 끝으로 다시 시작된 기나긴 절망의 시간들을 그는 음악적 발전의 계기로 삼았다. 내장산, 속리산 등지를 돌며 판소리를 통해 목소리를 틔우는 수련을 하였고, 어두운 연습실에서 완벽한 음악적 소양을 쌓기 위한 훈련을 거듭했다. 오명을 벗고 다시 일어나겠다는 오기와 자존심으로 버틴 눈물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음악활동이 금지되었던 가수들에게 해금조치가 내려지며 그가 다시 돌아왔다.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로 첫 전파를 탄 자작곡 ‘창밖의 여자’와 함께였다.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는 특유의 절창과 파격적인 멜로디는 당시 대중들의 억눌린 시대적 암울함을 표출시키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고, 함께 발표된 “단발머리”의 독특한 경쾌함은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대중의 기대에 부합하며 조용필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황제로 등극하게 했다.
데뷔 후부터 십 수년 간 축적해 온 그의 음악적 역량은 발라드, 록, 트로트, 민요, 동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연이어 발표된 완성도 높은 노래들은 유치원생부터할아버지까지 전 세대에 걸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대형쇼의 휘날레는 늘 그가 장식했고 매해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도 조용필의 이름은 언제나 마지막에 불려졌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보이던 가왕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보수적인 국내와는 달리 세계적인 뮤지션들의 교류가 활발했던 대중음악의 빅 마켓, 일본의 무대가 그것이다.
‘소름끼치는 혼의 목소리, 조용필’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시작한 일본 내 음악활동은 90년대 초반까지 600만여장의 음반판매, 3회의 골든 디스크상 수상, 한국인 최초 NHK 홍백전 참가 등 큰 성과를 이루며 지속되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한국어로 흥얼거리고 “한오백년”에 눈물짓던 이 시기의 많은 일본 팬들은 현재까지도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 현해탄을 넘어 한국의 공연장을 찾고 있다.
소속 음반사와의 계약에서 자유로워진 조용필은 이제 ‘하고 싶은 음악’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그해 나온 12집 앨범 자켓에 ‘90 vol.1’이라고 표기함으로써 90년대의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가겠다는 자의적 의지를 천명한 그는 TV등 방송매체를 떠나 라이브 공연장을 음악활동의 주무대로 삼겠다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다.
공연문화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 대중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익숙하고 편안한 방송매체를 스스로 떠나겠다는 어찌보면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의 선택은 한동안 그를 외롭게 했다. 이제 조용필을 TV에서 볼 수 없게 된 대중들은 어느새 그를 잊기 시작했고, 전설의 수퍼스타는 한동안 한산한 객석을 바라보며 노래해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기는 80년대 조용필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스타가 아닌 뮤지션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내공을 다지는 시간이 되었다.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한 그의 욕심은 세트, 음향, 조명 등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시스템을 진화시켰고, 사람들로 하여금 TV를 끄고 공연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가 원했던 대로 방송국 무대라는 공간이 주는 한계를 벗어나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노래와 그가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서로 공존하는 최상의 공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음악인생 35주년을 맞이하던 해인 2003년 1월, 조용필은 유일한 가족인 아내를 잃었다. 8월엔 실험정신 가득한 새로운 음반이 5년여 만에 발매되었고, 35주년 기념공연으로 기획된 잠실 스타디움 공연의 전 좌석이 공연 한달 여 전에 매진되는 기록이 세워졌다.
완벽한 공연을 위해 수개월 동안 준비한 많은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야속한 비가 공연 당일 쏟아졌지만 비를 맞으면서도 꼼짝 않고 그의 노래를 들어준 4만 5천여 관객들로 인해 오히려 35주년을 축복하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 되었다.
어둡게 밝게, 가볍게 혹은 무겁게 이어지는 그의 노래처럼 슬픔과 환희는 그의 삶에도 이렇게 예외없이 교차한다. 한없이 고독과 맞닿아 있는 찬란한 영광의 시간... 끝없는 고독마저 그에겐 음악을 위한 무한의 에너지로 바뀌는 것일까.
데뷔 45주년을 맞이하며 발표한 앨범 Hello의 수록곡 Bounce가 매가 히트하며 가왕의 귀환을 알렸다. 나 자신을 탈피해 또 다른 음악을 하고 싶었다는 그의 고백이 말해주듯 2013년의 조용필은 여전히 새로운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19번째 정규앨범에서도 감추지 않았고, 아직도 보여줄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 현재 진행형 뮤지션임을 입증해 보였다.
90년대 초,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음악을 하겠다는 각오로 모든 음악 순위프로그램에서 자진하차를 선언했던 조용필은 수십 년만에 다시 TV 음악프로그램 1위의 위치로 소환됐고, 음원 순위마저 1위로 올라섰다. LP로 데뷔해서 카세트테이프, CD시대를 거쳐 디지털 음원까지 정복한 실로 전무후무 대체불가한 가왕의 위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중이 열광한 이유는 결코 한계를 깨뜨리며 계속 승승장구하는 그의 기록에 있지 않다. 이미 45년을 군림한 수퍼스타의 노래 안에서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모든 세대의 통합이 이뤄질 수 있었던 힘은 오래전 음악을 시작하며 가졌을 그의 초심에 있지 않을까.
나이를 떠나 모든 세대와 소통하겠다는 유연함, 스스로 편안한 음악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풋풋한 열정이 살아있는, 우리가 아주 옛날에 알았던 그 오빠의 모습을 2013년에도 여전히 목격했다는 사실에. 알고 보니 가왕의 귀환이 아니라 영원한 오빠의 등장이었다는 그 사실 말이다.
1968년 데뷔한 해로부터 50년이 흘렀다. 이제 다행히 뮤지션이 딴따라로 치부당하는 세상은 아니지만 가수든 배우든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어야만 스타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유지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조용필은 여전히 티브이에서 보기 힘들다. 흔한 광고 하나 찍지 않으며 50년을 쌓아온 명성과 커리어를 자신의 음악에만 오롯이 허용하는 배짱과 자존심도 여전하지만 12개 도시 전국 투어 콘서트마다 연이은 매진을 기록할 만큼 오빠의 신화는 진행형이다. 4월에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공연 '봄이 온다'에 밴드 위대한 탄생과 많은 후배가수들을 이끌고 참여해 이념을 초월해 평화를 향한 예술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5월 12일, 50주년 기념공연 타이틀이자 긴 시간 함께 해 준 팬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신곡 'Thanks to you'가 공연의 오프닝을 장식하자, 오랜 팬들은 마음을 담은 대형 현수막으로 화답했다. "비처럼 젖어들었습니다. 햇살처럼 스며들었습니다. 내 삶에 깃든 당신의 음악으로 50년이 행복했습니다"
반세기를 이어온 음악의 바다 위, 다시 돛을 올려 항해를 시작하는 그의 노래에 젖어들지 않고 스며들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이 어디 있으랴. 우리곁에 무심히 흘러온 한강처럼 그의 노래는 언제든 어디서든 들려오고 불려지며 내 삶의 순간순간 비가 되고 또 햇살이 되어 함께 하고 있다.